3. 500일의 썸머 + α
어제 밤, 그냥 잠들기 뭐해서 500일의 썸머를 봤다.
보는 내내 든 생각은 딱 하나,
'아니 썸머가 왜 썅년이라고들 하는 건데?'
오늘 친구와 이 영화에 관해 대화를 했다. 그는 톰의 대화방식에 대해 말을 했다. 누가 봐도 특별한, 그러나 깊은 상처를 가진 썸머. 누구와 관계를 맺는 걸 어려워하는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에게 먼저 다가갔다. 하지만 톰은 찌질한+소심한 수준의 호감 표시를 하며 그걸 썸머가 알아주기만 기다렸다. 정작 대놓고 썸머가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어도 말을 돌리기만 하고.. (나 진짜 영화 시작하고 30분동안 톰 찌질해서 짜증났는데ㅋㅋㅋㅋ)
자신과 썸머의 데이트가 이어지고 나니 행복해하면서도 둘의 관계를 연인이라 규정짓지 못해 초조해하지만, 대놓고 연애를 하자고 말하진 못한다. 그런 요구를 하는 자신이 썸머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까봐, 썸머가 떠날까봐. 그러다가 무논리+흥분상태로 썸머에게 화를 낸다. "뿨킹 연인이고 싶다고!" 그 이후에 사이를 회복하려고 먼저 다가간 것도 썸머..
친구는 톰이 썸머의 세계관에 들어올 생각이 없었다고도 했다. 링고스타를 제일 좋아했다는 썸머에게 '누가 링고스타를 제일 좋아하냐'고 하고, 썸머에게 접근하는 남자에게 주먹질을 한 뒤에 썸머를 위해서라고 화를 낸다. 사실 본인을 무시하는 발언에 화가 나서 그런 것이면서.. 톰의 대화는 늘 자기의 세계 속에서만 이뤄졌고, 둘의 세계는 합쳐지지 않았다고 그가 말했다.
나 역시 동의한다. 썸머는 위의 과정 속에서 톰의 세계에 융합될 수 없는 자신과, 자신의 세계에 들어올 수 없는 톰을 발견했을 뿐이다. 자신의 깊은 내면까지 톰에게 이야기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문득 솟았다가, 시간이 흐를 수록 그 느낌이 확신으로 바뀌게 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톰의 수동적인 태도와 서투른 소유욕은 느낌이 확신이 되는 과정에 큰 원동력(?)이 된 것이고.. 이에 따라 '정의되지 않은 관계'는 끝이 난다.
관계를 규정짓기 싫다던 썸머가 톰을 떠난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내면에 들어와 있는 남편(이 될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과 나의 세계가 합쳐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도 전에, 이미 자신의 세계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떻게 다시 나의 세계에서 분리할 수 있겠어. 이미 둘의 세계는 합쳐져 경계를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썸머는 톰에게 충분히 마음을 줬다고 본다. 다만 위에서 말했던 톰의 대화법을 볼 때, 썸머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톰이 보이던 반응/대답이 쌓여서 둘 사이의 경계가 된 것이다. 썸머가 관계를 규정하기 싫다고 해놓고 이득만 취한 썅년이 아니라, 마음을 줬음에도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사람과의 경계를 허무는 걸 포기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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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생각했던 건 나의 지난 관계들이었다. 특히 내가 도망친 관계들. 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누가 내게 호감을 보이는 상황을 무서워한다. 웃긴 말이지만, 그 상황에 굉장히 거부감이 든다. 특히 가까이 있는 사람이 호감을 표하면, '아니 지금까지 나를 이런 눈으로 보고 있었나' 싶은 생각에 겁이 날 때도 있다.
잘 모르는 사람이 호감을 표하면 그건 그것대로 버겁다. '아니 그래서 저를 왜 좋아하시는지..' 이런 생각이 들고, 겁이 난다.
남들은 내가 연애를 쉽게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쉽게 연애를 시작한 적이 없다. 항상 수십번을 생각하고 주변 사람에게 묻고 나의 생각이 정리되면 그 사람을 만났다. 그래서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도망친 관계들도 있었다. 그런 관계들에 대해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그 관계들에서 왜 도망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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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으로부터 그 해답들을 얻은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는 '대화가 되지 않아서'였다. 상대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상대한테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면 도망쳤다. 사실 연애로 이어지기 이전의 사람들은 대개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나도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의 이야기는 경청하니까.. 그런 이치에서, 대부분 말을 상당히 잘 들어준다.
그렇지만 내가 말을 못하게 되는 상황들이 생긴다. '이 사람에게 이 말을 해도 될까' 라든가 '감정을 쏟아내도 괜찮을까' 싶은 순간이 자꾸 생기는 건, 내가 겁이 나서기도 했고 상대가 내 이야기에 흥미가 없음이 (혹은 이야기를 듣기 힘들어 하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될 때, 그 사람을 만나며 어차피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 때 그만뒀던 것 같다. 말 못하는 연애가 무슨 의미가 있나..
이 연장선 상에서, 세계의 융합이 불가능 할 것 같은 사람에게서도 도망쳤다. 상대에게 나쁜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을 때 - 내 안의 어두움을 그에게 보일 수 없을 거라고 판단이 설 때. 그때. 내가 용기가 더 이상 나지 않고, 그는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 때.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결국 우리가 서로를 받아줄 수 없는 결론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그에게 내가, 나에게 그가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마찬가지. 그의 어떤 부분이 불편하지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도 나의 어떤 부분을 불편해하는데 말을 하지 못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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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뜬금없게도,
썸머가 남편을 만난 것처럼, 정신차리고 보니 세계가 합쳐져있는 사람과는 연애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론이 이상한가.. 연애 이제 안한다고, 내 마음 좀 쉬어야 겠다고 말했는데, 그런 사람이라면 그냥 내게 쉴 곳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말수가 정말 많은 편이지만 정작 나의 깊은 이야기들은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가 정말 많이 중요하다. 신뢰해서 이야기했다가 상처받은 적도 있었고, 그런 경험 때문에 더더욱 상대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차원을 넘어서, '나의 내면을 받고,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그런 사람을 만날 것이다.
'어딘가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운명에 대한 믿음은 아닌데.. 아무튼. 세계를 합칠 수 있을까 걱정도 하기 전에 세계가 합쳐져 있는 사람, 눈을 맞추고 대화해주는 따뜻한 사람, '또 오해영'에 나온 것 처럼 '그냥 속을 깐' 사람.
그런 사람.
정말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연애를 해야지.
아니지 그런 사람이라면 정신차리고보니 연애를 하고 있겠지.
아무튼
나도 행복할 자격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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