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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24. 좋은 세상 / 박준 * 위트 앤 시니컬 낭독회를 위해 제작된, 박준 시인의 『여름의 일』 중에서 좋은 세상 눈은 다시 내리고 나는 쌀을 씻으려 며칠 만에 집의 불을 켭니다 섣달이면 기흥에서 영아가 올라온다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얻는 휴가를 서울에서 보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난달에는 잔업이 많았고 지지난 달에는 함께 일하다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르느라 서울 구경도 오랜만이었을 것입니다 쌀은 평소보다 조금만 씻습니다 묵은해의 끝, 지금 내리는 이 눈도 머지않아 낡음을 내보이겠지만 영아가 오면 뜨거운 밥을 새로 지어 먹일 것입니다 언 손이 녹기도 전에 문득 서럽거나 무서운 맘이 들기도 전에 우리는 밥에 숨을 불어가며 세상모르고 먹을 것입니다 작년이었나- 노동자들의 시간이 길에 멈춰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겨울이 아니어도 마음이 추워서.. 더보기
17. 당신이라는 세상 / 박준 *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중에서 당신이라는 세상 박준 술잔에 입도 한번 못 대고 당신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 많은 술을 왜 혼자 마셔야 하는지 몰라 한다 이렇게 많은 술을 마실 때면 나는 자식을 잃은 내 부모를 버리고 형제가 없는 목사의 딸을 버리고 상처 같은 생선을 잘 발라먹지 못하는 친구를 버린다 버리고 나서 생각한다 나를 빈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고 골목이 많아 가로등이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에는 옷(衣)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만 .. 더보기
5. 오늘의 식단 - 영(暎)에게 / 박준 오늘의 식단 ― 영(暎)에게 박준 나는 오늘 너를 화구에 밀어넣고 벽제의 긴 언덕을 내려와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말을 건네는 친구에게 답 대신 근처 식당가로 차를 돌린 나는 오늘 알았다 기억은 간판들처럼 나를 멀리 데려가는 것이었고 울음에는 숨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울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였다 너는 오늘 내가 밀어넣었던 양평해장국 빛이라서 아니면 우리가 시켜 먹던 할머니보쌈이나 유천칡냉면 같은 색이라서 그걸 색(色)이라고 불러도 될까 망설이는 사이에 네 짧은 이름처럼 누워 울고 싶은 오늘 달게 자고 일어난 아침 너에게 받은 생일상을 생각하다 이건 미역국이고 이건 건새우볶음 이건 참치계란부침이야 오늘 이 쌀밥은 뼈처럼 희고 김치는 중.. 더보기